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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프랑스 사람들이 '개와 늑대사이의 시간'이라 일컫는 시간이 있다. 오후 늦게 해가 지고 어둠이 조금씩 스며들때, 멀리서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잘분간이 가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낮도 밤도 아닌 모호한 시간에 뚜렷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보일것은 보이는... 불분명한 시간... 하루 중 어둠이 서서히 세상을 덮는 해질 무렵의 시간.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낮의 밝음이 어슴푸레 내려 앉는 어둠과 뒤섞여, 저 멀리 있는 짐심으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불분명한 시점이 존재한다. 어둠과 밝음, 난과 바이 혼재된 시간을 프랑스 사람들은 L' heure entre chien et loup라고 부른다 '선과 악도 모두 붉을 뿐이다' 더보기
지하인간 / 장정일 지하인간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더보기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 이외수 저무는 바다를 머리맡에 걸어두고 이외수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연인은 노래가 되고 어떤 연인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 번씩 바다는 흔들리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 안으며 나지막히 그대 이름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더보기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 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 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올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 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 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 입니까... 더보기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 더보기